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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地域紀行

[일본 고치현] 목포 출신 한국고아의어머니 [윤학자]여사의 추모비 ~ 방문시 꼭 들려 주세요,

 2010년 2월 8일 ~ 11일 고치현 정부의 초청으로 다녀 왔습니다. 관광 일정으로 조정하면서 관계자가 특별히 관심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 보더군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봤지만 많은 정보가 없어서 고민하던 중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여사의 추모비가 고치현에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어 그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고향 高知市若松町에 세워져 있는 추모비

추모비 앞에 놓여 있는 꽃은 [사자왕]이 헌화한 것입니다. 원래 화병이 있었다고 [김 혜영]씨가 언급했는데 안 보이더군요.. 매년 고치현 도지시가 정기적으로 추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치현을 방문하는 전라남도 목포 출신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생각되며, 타지역에서 가시는 분이라도 오대산(五臺山, 일본명 오다이산)에 가면 지나 가는 길목이므로 추모를 하고 가면 좋지 않을까요?

[윤학자](尹鶴子)여사 그 분은 누구인가?

본명 [타우치 찌즈꼬] (田內 千鶴子)라는 1912년10월31일 고치시 와까마쯔쵸우(高知市 若松町, 高知縣)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부친(德治)이 조선총독부의 관리인 관계로 가족과 함께 7살 때 1919년 한국 목포로 건너왔다. 20살 때 부친과 사별해, 모친은 조산부의 일을 하면서 모녀 둘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1932년 정명여학교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그녀는, 어느 날 목포의 고아원 「목포 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해, 2년 후 이곳에서 혼자 공생원을 운영하는 청년원장 전도사이자 거지대장으로 불리우던 윤치호로부터 결혼을 제의받았다.

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목포를 점령한 공산군에 의해 인민재판에 부쳐 졌으나, 그때 동네 사람 전원이 찌즈꼬(千鶴子)의 무실을 호소했으며, 남편인 윤치호도 자신을 먼저 사형시켜 달라고 호소한 온정의 말에, 공산군들도 더 이상 추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많은 고아가 생겨, 공생원도 그러한 고아들로 넘쳐나, 원장은 500명의 아이의 먹을거리 조달을 위해 광주로 외출했으나, 그 길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찌즈꼬(千鶴子)는 남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으며, 때에 따라서는 거지와 같은 일을 하며 혼자서 아이들을 끝까지 지켯다.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마침내 그녀의 명성은 목포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울려 퍼졌으며 63년 4월에는 박정희 의장의 공생원 방문 및 8월에 '문화훈장 국민상'을 수여받게 되었다. 또 68년 일본 황실에서 남수포상을 받았다.
신문과 방송으로 일본에까지 알려져 NHK 방송에 출연, 일본인 방문인도 줄을 이었다.

1965년 목포시가 수여하는 제1호 시민의 상을 수여하고 병상에 눕게 되고 1968년 10월 31일 57세의 나이로 생일날에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장례식은 3만여명의 인파 가운데 치루어졌다.

2009년 12월 14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한ㆍ일기독의원연맹 창립10주년 기념식에서 故 [윤학자]여사의 장남인 윤기 일본 고향의 집 이사장이 ‘제1회 한일평화선교 대상’ 시상식에서 대리 수상하였으며, "한ㆍ일기독의원연맹"의 한국측에서는 민주당 [김영진]의원, 일본측은 민주당 [도이 류이찌]의원이 대표로 있다.

고인의 장남으로 26세에 대를 이은 [윤 기]이사장이 목포 공생원의 고아들을 돌보는 한편 일본 고베, 교토 등지에서 재일교포 노인들의 안식처인 고향의 집을 설립해 어려운 노인들을 돌보면서, 특히 도쿄와 서울에 제4, 5의 고향의 집 건립을 추진 중이다.

추모비의 뒷면 ~ 추모비 바닥에 작은 돌이 많이 깔려 있습니다.
총 수량이 몇 개나 될까요? 해답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녀의 손을 거쳐간 원아수만 3,000명에 달하므로 작은 돌 3,000개를 깔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몇십년을  사시면서 한국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말을 하시며, 김치를 먹으셨던 [윤학자]여서는
임종직전에 일본말로 "우메보시(매실짱아지)"가 먹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2008년10월8일 목포공생원 개원 80주년을 맞이하여  이날 오오쿠보 마키(大久保 摩紀) 아사히신문 논설
위원과, 미즈타니 코쇼우(水谷 莘正) 불교대학 이사장, 마쯔이 이즈히코(松井 珍男子) 교토시 전 부시장,
오부찌 케이조(小淵 惠三) 전 총리의 부인 찌즈코(小淵 千鶴子)여사등 일본인 20여 명이 방문해
기념촬영을  같이했다.  

찌즈코(千鶴子)여사는, 목포공생원 제2대 원장인 타우치 찌즈꼬(田內 千鶴子, 한국명 尹鶴子/윤학자)씨가
생전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우메보시가 타베따이...」라고 쓴 글에 감동되어, 2000년3월 오부치 전 총리가
 재직시절 목포공생원에 매화나무 묘목 20여 그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오부찌 케이조(小淵惠三) 총리는 TV에 출연한 자리에서 「愛の默示錄」의 상영이, 이제부터 한일
문화교류의 출발점이 됐다고 환영했고, 이후 매화나무 묘목 20여 그루를 보내왔다.


 매화나무 묘목 20여 그루를 보낸 오부치 총리는, 다음 달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으며, 회복되지
않아 결국 총리직을 사임했고, 매화나무의 결실을 보지 못한채 63세의 젊은 나이에 영면했다.  그로부터
8년 뒤 그의 부인 찌즈코(小淵 千鶴子)여사는 공생원 8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매화나무가 그녀의
 기념비 주위에 잘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고향인 高知市若松町에 타우치 찌즈꼬(田內千鶴子)씨의 기념비가 그녀의 명일인 10월31일
제막식이 행해졌다. 식전에는 목포공생원의 아이들도 참석하였으며 이것을 계기로 10월31일을
「국제교류의 날」로 하기로 정했다. 


1999년 한국정부의 일본문화 해제금지 허가 제1호로써 「愛の默示錄, 사랑의 묵시록」이 상영이 허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감명을 받았으며,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대상 영화부문의 상을 받았다.

 2008년4월 재일교포 출신의 격투기 선수인 추성훈씨가 목포공생원을 위로 방문했다. 
 컴필레이션 음반
"2008 연가"에 참여해 받은 개런티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목포공생원에는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흉상이 있다.   이것은 2003년10월15일 제막된 것으로,
박태양 전남도지와 전태흥 목포시장이 일본에서 보고 온 여사의 동상을 보고 제안해 세워진 것이다.
현재 67명의 원생이 있으며,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아들 尹基(66세), 손녀 尹綠(35세)씨에
이어 현재는 외손녀인 정애라씨가 운영을 하고 있다. 

위글의 출처 : http://kumari.namoweb.net/bbs/zboard.php?id=bord51&no=75

추모비 옆은 선착장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다 본 석양



이상 사자왕이었습니다.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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